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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Baseball)
야구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보다 더 많은 득점(Run)이다. 득점을 위해서는 타자가 1루, 2루, 3루 베이스(base)를 거쳐 원래 시작했던 홈(home)으로 돌아와야 한다. 야구가 '베이스볼'인 이유다.
머니볼(Money ball)
하지만 현대 프로 스포츠는 공이 아니라 돈으로 하는 싸움이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좋은 선수가 필요하다. 더 좋은 선수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써야 한다. '많은 연봉'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샐러리캡 관련 조항이 전혀 없는 메이저리그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2011년 메이저리그는 연봉 상위 4팀(양키스 필라델피아 보스턴 에인절스)의 연봉총액 평균이 하위 4팀(샌디에이고 피츠버그 탬파베이 캔자스시티)보다 무려 4.02배가 많았다. 이는 NFL의 1.47배, NBA의 1.88패, NHL의 1.98배와 비교하더라도 월등한 차이다(NFL-NBA는 2009-2010시즌, NFL은 2010-2011시즌 연봉으로 비교). 즉, 메이저리그는 북미 4대 스포츠 중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곳이며 가장 '불평등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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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돈을 적게 쓰고도 좋은 성적을 내는 팀들도 있다. 올해 선수들의 평균연봉이 158만달러였던 탬파베이 레이스는 평균 599만달러짜리 선수들로 구성된 보스턴 레드삭스를 제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2008년에는 심지어 146만달러의 평균연봉으로 476만달러의 보스턴과 674만달러의 양키스를 제치고 지구 우승을 차지했으며 월드시리즈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싸고 좋은' 선수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연봉이 올라간다. 가난한 팀이 할 수 있는 것은 눈물을 머금고 이들과 이별하는 것이다. 클리블랜드에게 CC 사바시아, 클리프 리와 모두 계약할 수 있는 돈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라.
역사상 저연봉 팀이 오랫동안 강팀의 자리를 유지한 경우는 2번뿐이었다. 1920년대 중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당시 메이저리그 팀이 유망주를 마이너리그 구단에서 직접 사오던 관례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마이너리그 구단을 소유, 직접 선수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파격적이었던 이 모델은, 그러나 양키스를 필두로 모든 팀들이 따라하기 시작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그로부터 20여년 후, 브루클린 다저스는 처음으로 흑인 선수들을 등용했고 1940~1950년대 내셔널리그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흑인 선수들의 위력을 깨달은 팀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다저스도 더 이상 흑인 선수들을 독점할 수 없게 됐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브랜치 리키가 만들어낸 혁신이었다.
1965년에 시작된 아마추어 드래프트는 이러한 불공정을 해소해 줄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FA 제도 도입 후 드래프트에서마저 처절한 '돈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높은 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다고 얇은 지갑으로 나섰다가는 '윈도 쇼핑'만 실컷하고 돌아서야 하는 세상이 됐다.
1999년 포스트시즌에 나선 8팀 중 6팀은 연봉총액 1~6위 팀들이었으며 나머지 두 팀도 9위와 11위였다. 메이저리그는 말 그대로 '머니 볼'이었다.
그러나 2000년, 웬 돌연변이가 하나 튀어나왔다. 전체 25위의 연봉총액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였다. 그들에게는 브랜치 리키를 빼닮은 혁신가가 있었다. 빌리 빈이었다. 그리고 빈이 이룬 혁신은,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적인 실패에서 비롯됐다.
오클랜드 빌리 빈 단장 |
실패한 유망주
1962년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태어난 빈은 테드 윌리엄스의 고향인 샌디에이고에서 자랐다. 해군장교였던 아버지가 시간이 날 때마다 그와 함께 한 것은 야구였다.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빈은 지역 최고의 고교 선수로 성장했다. 빈이 나온 란초 버나르도 고교는 행크 블레이락의 모교로, 고교 시절 빈의 코치였던 샘 블레이락은 행크 블레이락의 삼촌이다.
졸업반이었던 1980년의 어느날, 빈은 토론토 팻 길릭 단장을 비롯한 여러 구단의 스카우트들이 있었던 트라이아웃에서 60야드(55미터)를 6.4초에 주파, 모두를 놀라게 했다(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60야드를 측정하는 이유는 홈부터 2루까지의 거리가 60야드이기 때문으로, 올해 드래프트에서 최고의 툴 플레이어 중 한 명으로 뽑혔으며 캔자스시티로부터 전체 5순위 지명을 받은 버바 스탈링이 가지고 있는 60야드 기록은 6.56초다).
뛰어난 신체적 능력과 함께 '잘생긴 백인'이라는 최고의 상품성을 가지고 있었던 빈에게 홀딱 반한 팀은 전년도 내셔널리그 꼴찌 팀 뉴욕 메츠였다. 결국 메츠는 그 해 전체 1순위로 대럴 스트로베리를 뽑은 다음, 피츠버그로부터 가져온 23순위 보상 지명권으로 빈을 지명했다. 당초 스탠포드대학에 진학, 야구와 미식축구(그는 뛰어난 쿼터백이기도 했다), 그리고 공부를 병행할 계획이었던 빈은, 그러나 메츠의 클럽하우스를 방문한 이후 생각을 바꿔 메츠에 입단했다. 메츠는 빈이 스트로베리보다 먼저 메이저리그에 등장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빈 자신도, 메츠도, 완벽해 보이는 그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실패에 대한 태도'였다. 다혈질이었던 빈은 고교 시절부터 삼진을 당하고 들어오면 덕아웃에서 무언가를 집어던져 꼭 화풀이를 해야 했다. 심지어 알미늄 방망이를 직각으로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실패가 주 교육 목적인 마이너리그에서 이는 더 심각해 졌다. 빈은 계속되는 실패를 맛보며 어느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됐다. 그리고 야구는 그에게 악몽이 됐다.
경쟁자였던 스트로베리, 그리고 마이너 시절 동료이자 13라운드 지명자에 불과했던 레니 다익스트라가 슈퍼스타가 된 반면, 빈은 저니맨 신세였다. 1984년에 데뷔, 1989년까지 6년간 성적이 148경기 .219 3홈런 29타점이었던 27살의 빈은 결국 선수 생활을 접기로 했다. 그리고 샌디 앨더슨 단장을 찾아가 스카우트가 되겠다고 했다. 선수 생활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한 가지 신념이었다. 자기와 같은 선수는 절대 뽑아서는 안 된다는 것.
아트 하우 감독과 함께 |
변혁을 만들어내다
빈이 정말로 운이 좋았던 것은, 그에게 샌디 앨더슨(현 메츠 단장)이라는 멘토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빈이 만들어낸 혁신은 앨더슨이 시작한 것을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인 앨더슨은 장인이 오클랜드의 구단의 지분을 매입한 것을 계기로 구단 일을 시작했고 1983년 단장이 됐다. 앨더슨은 현장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일을 잘해냈다. 이에 오클랜드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5년 전폭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구단주 월터 하스가 사망하면서 오클랜드는 하루 아침에 빈털털이 구단이 됐다. 이는 평소 스포츠 심리학과 세이버메트리션을 통해 야구를 다른 눈으로 바라봤던 앨더슨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앨더슨은 야구는 누가 더 많은 득점을 하느냐의 싸움이며 득점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베이스를 점령하는 것, 바로 출루라고 생각했다. 이에 재정적 문제로 인해 더 이상 리키 헨더슨, 호세 칸세코 같은 파이브툴 플레이어를 보유할 수 없게 되자 한 가지 툴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로 출루였다. 1995년 이후 오클랜드는 출루율이 뛰어난 타자들과 피출루율이 낮은 투수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앨더슨은 또한 타자의 파워를 중시했는데, 이 역시 목적은 출루율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즉, 파워가 좋은 타자는 투수가 좀더 조심스러운 투구를 하기 때문에 볼넷을 얻어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팀이 기틀을 잡아가고 있던 1997년 10월, 앨더슨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으로부터 사무국의 부회장이 되어달라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앨더슨은 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의 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부단장에게 팀을 맡겼다. 빌리 빈 시대의 개막이었다. 빈은 앨더슨보다 더 과격하고 더 급진적으로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야구에서 전통적인 스카우트 방식은 타고난 재능의 선수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에 스카우트들은 현재 성적이나 타격 모습, 피칭 모습보다도 선천적인 재능과 운동능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에 많은 선수들이 공을 멀리(또는 강하게) 던질 수 있다는 이유로, 남보다 빨리 뛸 수 있다는 이유로 유니폼을 입었다(몬트리올 입단 테스트에서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한 것도 송구와 달리기뿐이었다). 하지만 빈은 이러한 신체적 능력이 성공을 담보한다고 믿지 않았다. 본인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빌리 빈의 오클랜드는 선수들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즉 재능(tool)보다는 실제로 발휘될 수 있는 실현 가능성(skill)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이는 말 그대로 누구도 침범하지 않은 '블루오션'이었다. 남들이 툴 플레이어를 찾아 헤매는 동안 오클랜드는 신체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또는 멋진 신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른 팀들이 외면하고 있는 아마추어 선수들 또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997년 오클랜드는 키가 작아 다른 팀들이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던 팀 허드슨을 6라운드에서 뽑았다. 1999년에는 폭발적인 강속구를 던지는 벤 시츠를 놔두고 전체 9순위로 느린공의 배리 지토를 선택했다(시츠는 10순위 밀워키가 지명). 둘은 원래부터 엘리트였던 마크 멀더와 함께 빌리 빈의 오클랜드의 핵심 선수들이 됐다.
마쓰이 히데키 입단식에서의 모습 |
성공, 그리고 추락
2000년대가 시작되자 오클랜드는 말 그대로 질주를 시작했다. 허드슨-멀더-지토가 도합 99만7500달러의 연봉 합계로 56승을 거둔 2001년, 오클랜드는 전체 29위의 연봉 총액으로 ML 2위(102승)의 성적을 냈다. 시즌이 끝나고 오클랜드는 팀의 1번타자(자니 데이먼) 3번타자(제이슨 지암비) 마무리 투수(제이슨 이스링하우젠)을 잃었다. 하지만 2002년 3인방은 197만달러로 57승을 거뒀고, 오클랜드는 28위의 연봉 총액으로 메이저리그 최다승(103승) 팀이 됐다. 2003년 연봉 합계가 635만달러로 뛰어오른 3인방은 46승에 그쳤지만, 오클랜드는 여전히 23위의 연봉 총액으로 ML 4위에 해당되는 96승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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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브랜치 리키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팀들의 모방이 시작된 것이다. 오클랜드는 대학선수의 성적이 고교선수의 성적보다 훨씬 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드래프트에서 대학선수 위주로 뽑았다. 하지만 오클랜드의 성공 이후 대학선수의 높은 성공 가능성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다른 팀들도 대학선수들을 흘려 보지 않기 시작했다. 이에 오클랜드는 더 이상 적은 돈으로 괜찮은 대학선수들을 잡지 못하게 됐다. 이제 아마추어 시장에는 빈과 오클랜드만 알아볼 수 있었던 숨은 보석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첫 2년 간의 시행착오 후, 빈은 트레이드 시장을 마음껏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에 제이슨 이스링하우젠, 자니 데이먼, 코리 라이들, 저메인 다이, 빌리 코치, 키스 폴크, 댄 해런 등 수많은 트레이드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로 인해 빈은 트레이드 시장에서 기피 대상 1순위가 됐고, 심지어 아예 빈의 전화를 받지 않거나 빈의 제안은 일단 의심하고 보는 단장들이 생겨났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양키스나 보스턴 같은 부자 구단들은 유망주를 단지 스타 선수를 데려오기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유망주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면서 빈이 트레이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망주의 수준 역시 크게 낮아졌다. 빈은 이를 두고 "결국 가장 많은 돈을 쓰는 팀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프리미어 리그 축구처럼 될 것"이라며 한숨을 쉰 바 있다.
빈 단장의 주요 트레이드
(2001년 1월) vs 척 라마(탬파베이) 앨런 베어드(캔자스시티)
[+] 자니 데이먼, 마크 엘리스(←캔자스시티) 코리 라이들(←탬파베이)
[-] 벤 그리브(→탬파베이) 앙헬 베로아, A J 힌치(→캔자스시티)
(2004년 12월) vs 존 슈어홀츠(애틀랜타)
[+] 후안 크루스, 댄 메이어, 찰스 토머스 [-] 팀 허드슨
(2004년 12월) vs 월트 자케티(세인트루이스)
[+] 댄 해런, 키코 칼레로, 대릭 바튼 [-] 마크 멀더
(2005년 12월) vs 네드 콜레티(다저스)
[+] 밀튼 브래들리, 안토니오 페레스 [-] 안드레 이디어
(2007년 12월) vs 조시 번스(애리조나)
[+] 브렛 앤더슨, 카를로스 곤살레스, 크리스 카터, 애런 커닝햄, 대나 이블랜드, 그렉 스미스 [-] 댄 해런, 코너 로버슨
(2008년 1월) vs 켄 윌리엄스(시카고 화이트삭스)
[+] 라이언 스위니, 지오 곤살레스, 파우티노 데 로스 산토스 [-] 닉 스위셔
(2008년 11월) vs 댄 오다우드(콜로라도)
[+] 맷 할러데이 [-] 카를로스 곤살레스, 휴스턴 스트리트, 그렉 스미스
더 큰 문제는 제2, 제3의 빌리 빈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신호탄은 2003년 보스턴이 28살의 테오 엡스타인을 선택한 것이었다. 2002시즌이 끝난 후, 3년 연속 디비전시리즈 5차전 패배에 한계를 느낀 빈은 오클랜드를 떠나 보스턴으로 가기로 했다. 최고의 연봉과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무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은 생각을 바꿔 오클랜드에 남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4살 된 딸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아니러니하게도, 2003년 오클랜드는 디비전시리즈에서 보스턴에게 또 한 번의 리버스 스윕을 당한다).
빈을 얻지 못하게 되자 보스턴은 빈과 닮은꼴인 부단장 엡스타인을 단장에 임명했다. 이후 2004년 다저스가 폴 디포데스타, 2006년 텍사스와 탬파베이가 존 다니엘스와 앤드류 프리드먼, 애리조나가 조시 번즈를 고르면서 '명문대 출신의 젊은 단장'은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사조가 됐다. 세이버메트리션을 꿰뚫고 있으며 빈을 목표로 하며 꿈을 키웠던 이들은 빈과 그의 전략에 대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2002년 빈은 몬트리올과 보스턴 사이에 끼어서 보스턴에서 케빈 유킬리스를 데려오려고 했지만(이런 류의 3각 트레이드는 빈의 주특기였다), 이는 유킬리스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엡스타인에 의해 저지됐다.
빈 모델의 또 다른 문제는 포스트시즌에 나가면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빈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피했다.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은 뛰어난 수비력과 주루능력을 가지고 있기 마련. 오클랜드 선수들에게는 그게 없었다. 결국 오클랜드는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년 연속으로 디비전시리즈에서 2승3패로 탈락하는 충격을 맛봤다. 2001년 디비전시리즈 3차전에서 제레미 지암비가 홈으로 걸어들어오다 데릭 지터의 'The Flip'에 당한 장면이나,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무수한 수비 실책이 일어난 장면은, 빈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약점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오클랜드에 그런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머니볼>에서 다뤄져 유명해진 2002년 드래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2년 오클랜드는 지암비, 데이먼, 이스링하우젠 3명의 FA를 잃은 덕분에 2라운드 전까지 무려 7장의 지명권을 쓸 수 있었다. 첫 37순위의 지명권 중 7장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빈에게 주어진 돈은 전년도 텍사스가 마크 테세이라와 계약하는 데 쓴 950만달러보다도 적은 940만달러가 전부였다. 빈은 이 돈으로 35명과 계약해야 했고, 때문에 비용이 고려된 드래프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오클랜드식 모델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스타 1명을 유망주 3명과 바꾸면 그 중에서 스타가 1명 나와줘야 한다. 하지만 유망주가 터질 확률은 로또 못지 않다(빈은 스타 선수를 부자구단에 보내고 유망주를 받는 두고 '장기매매'라고 불렀다). 또한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이제는 양키스조차 헤수스 몬테로 같은 선수를 트레이드하지 않고 지킴으로써, 트레이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망주에 한계가 생겨버렸다. 또한 '싸고 좋은 선수'가 드래프트를 통해 공급되어야 하지만, 드래프트 시장에서의 무한경쟁으로 이마저도 어렵게 됐다.
2004-2005년 포스트시즌에 진출에 실패한 오클랜드는 지토의 마지막 해였던 2006년 다시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아 이번에는 디비전시리즈를 통과했다. 하지만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에게 4연패를 당했다. 그리고 이 패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순위 경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81승81패로 2006년 이후 첫 5할 승률을 기록했던 오클랜드는 올해는 74승88패로 더 후퇴했으며, 5년째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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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항해지는?
2008년 오클랜드의 스프링캠프에서 단연 화제는 괴물 같은 스윙을 하는 카를로스 곤살레스였다. 곤살레스가 배팅 케이지에 들어서면 선수들이 그의 스윙을 보기 위해 하던 훈련을 잠시 멈출 정도였다. 하지만 빈에게는 곤살레스의 천부적인 운동능력보다 인내심 부족이 더 크게 느껴졌다. 빈은 곤살레스가 85경기에서 .242 .273 .361에 그치자 콜로라도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빈이 자신의 원칙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동안 '제2의 빌리 빈'들은 빈보다 훨씬 유연하게 행동했다. 탬파베이 프리드먼, 텍사스 다니엘스 등이 빈의 스카우트 철학에 전통적인 스카우트 방식을 접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혁신적이었지만 극단적이기도 했던 빈의 모델은 '구 버전'이 됐다.
원작을 넘어서는 강력한 '카피캣'들의 등장으로 한계를 느끼게 된 빈은 변화를 시도했다. 이에 그동안 외면했던 발이 빠른 선수들, 수비가 뛰어난 선수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코코 크리습, 라제이 데이비스 등). 하지만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특히 2011년 프리몬트로 이전, 시스코필드라는 최신식 구장을 열기로 한 계획이 무산되면서 빈이 세웠던 오클랜드의 미래 계획은 헝클어졌고, 오클랜드는 탬파베이와 함께 가장 미래가 어두운 구단이 됐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지만, 지금은 정체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빌리 빈. 과연 그는 새로운 아디이어를 가지고 있을까. 영화 <머니볼>의 개봉을 맞아 국내 메이저리그 팬들이 빈에게 직접 질문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빈의 열 가지 답변에는 그에 대한 힌트도 살짝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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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각을 한 것은 빈이 최초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샌디 앨더슨이 있었고, 또 그 앞에는 빌 제임스가 있었다. 승승장구하는 그도 더 이상 없다. 이제 최고의 단장을 대라면 그가 아닌 다른 이름들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빈은 새로운 생각을 가장 먼저 실행에 옮겼으며, 그로 인해 맨 앞에 서서 거대한 편견, 그리고 변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과 싸워야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야구는 바뀌었다. 아니 이제는 모두가 빈과 같은 눈으로 야구를 바라보고 있다.
빌리 빈 역할을 맡은 브래드 피트 |
영화 <머니볼> 주요 등장인물 소개
영화는 2001년 디비전시리즈 5차전에서 오클랜드가 양키스를 상대로 리버스 스윕을 당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오클랜드는 팀의 핵심 선수들인 지암비, 데이먼, 이스링하우젠이 모두 FA로 풀리는 비상 상황. 하지만 구단주는 추가적인 금전 지원을 거부한다. 어느날 빈은 클리블랜드 샤파이로 단장을 찾아갔다가 야구의 '야'자도 모를 것 같은 청년을 만나게 되는데...
영화는 드라마적 요소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실제에 충실했다. 이에 감동을 위한 무리한 픽션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빈 역할을 맡은 브래드 피트도 단장으로서 느끼는 고뇌와 개인적인 갈등을 감탄스러울 정도로 담담하게 표현했다. '이래서 야구는 재밌다'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영화. 야구 팬들이 가장 아끼게 될 '야구 영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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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티포데스타(극중 이름 피터 브랜드) : 빈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빼내온 오른팔. 1999년부터 빈과 호흡을 맞췄다. 2002년 토론토 블루제이스로부터 단장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고(토론토는 대신 빈의 '왼팔'이었던 리치아디를 데려갔고, 리치아디는 토론토의 재앙이 됐다), 2004년 마침내 빅 마켓인 LA 다저스의 단장이 됐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디포데스타에게는 샌디 앨더슨이 없었다. 2005년 다저스는 토미 라소다가 주축이된 '왕정복고파'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디포데스타는 해임됐다. 이후 샌디에이고의 단장 보좌역을 거쳐 지금은 메츠에서 샌디 엘더슨 단장의 보좌역을 맡고 있다. 극중 브랜드는 예일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디포데스타는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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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하우 감독 : 1995시즌을 마지막으로 토니 라루사가 팀을 떠난 후 1996년부터 2002년까지 오클랜드를 맡았던 감독. 빈이 직접 고른 감독이 아니었고, 빈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빈과 큰 대립각을 세우지도 않았다. 2001-2002년 102-103승을 거두고도 재계약에 실패한 후 메츠로 옮겼지만, 2003-2004년 2년간 95-91패에 그친 것이 감독으로서의 마지막이었다.
그래디 퓨슨 :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오클랜드의 스카우팅 부서를 책임졌던 스카우팅 디렉터. 그러나 빈과의 철학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갈라서게 된다. 2002년 텍사스로 이적, 텍사스의 2003-2004년 드래프트를 진두지휘했다(2003년 존 댕크스 9순위, 2004년 토머스 다이아몬드 10순위 지명).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샌디에이고의 스카우팅 디렉터를 맡다가 지난해 빈과 화해에 성공, 특별 보좌역으로 오클랜드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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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저스티스 : 배우 할 베리의 남편이기도 했던 1990년대 최고의 스타 중 1명. 2001년 디비전시리즈 5차전에서 양키스 소속으로 오클랜드 에이스 허드슨으로부터 쐐기를 박는 솔로홈런을 때려내기도 했다. 시즌 후 빈은 양키스로부터 350만달러의 연봉보조와 함께 저스티스를 받아왔고, 저스티스는 118경기에서 .266 .376 .410 11홈런 49타점을 기록한 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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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해티버그 : 빌리 빈의 믿음을 완벽하게 현실화시켜준 선수. 1995년에 데뷔, 2001년까지 454경기에서 .267 34홈런 159타점에 그쳤으며 팔꿈치를 다쳐 포수로서의 생명력도 끝난 상황이었지만, 빈은 통산 타율과 출루율의 차이가 1할 가까이 된다는 점에 주목, 1루수로 영입했다. 론 워싱턴 수비코치(현 텍사스 감독)와의 집중 훈련을 통해 1루에 안착하는 데 성공했으며, 2002년 136경기에서 .280 .374 .433 15홈런 61타점의 좋은 활약으로 팀에 크게 기여했다. 2005년까지 오클랜드에서 뛰었고, 2006년 신시내티로 이적, 3년을 더 뛰고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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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MLB 카툰] 머니볼이란 무엇인가?
기사입력 2011-10-2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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